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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시간.

on the road../다르지만 같은 사람.

by 아이리스정 2006. 10. 28. 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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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다. 고오로기는 여전히 텔레비젼 리모컨을 손에 들고,

아무렇게나 만지작거리고 있다. 멀리서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온다.

 "마리는 윤회 같은 걸 믿어?"

 마리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마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그럼 내세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해?"

 "그런 일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하지만 내세가 있다고 생각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 같아요."

 "죽어버리면 그 다음은 무無밖에 없다, 이 말이지?"

 "기본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해요."라고 마리는 말한다.

 "나는 말이야, 윤회 같은 게 틀림없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뭐라고 할까, 그런 게 없다면, 너무 두려워.

그 무라는 걸 나는 이해할 수 없거든. 이해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어."

 "무라는 건 절대적으로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니까, 특별히 이해하거나 상상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닐까요?"

 "그렇지만, 만에 하나, 그 무라는 것이 이해나 상상 같은 걸 확고하게 요구하는 종류의 무라면 어떡해?

마리짱도 죽어본 적은 없잖아. 그렇다면 실제로 죽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지."

 "그건 확실히 그렇지만......"

 "그런 걸 생각하기 시작하면, 말도 할 수 없는 두려움이 서서히 어김없이 엄습해 오는 거야"

라고 고오로기가 말한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차고, 몸이 움츠러드는 것 같아. 그럴 바엔 윤회를 믿는 게 차라리 마음 편해.

다음 세상에 아무리 모진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 모습을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는 있으니까. 예를 들면 말로 태어난 내 모습이라든가,

달팽이로 태어난 내 모습 같은 것 말이지. 혹시 바로 다음에는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앟는다 해도,

다시 그 다음 윤회의 기회에 또 희망을 걸어볼 수 있잖아."

 "그래도 나에겐 역시, 죽음 이후엔 아무것도 없다는 게 자연스럽게 느껴져요." 라고 마리가 말한다.

 "그건 말이야, 아마도 마리 짱이 정신적으로 강하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요?"

  고오로기는 고개를 끄덕인다. "마리 짱은 단단하게 자기의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처럼 보여."

  마리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런 것 없어요. 난 단단하지 못한걸요. 어렸을 때,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가질 수 없어서, 늘 겁먹은 태도로 안절부절못했죠.

그래서 학교에서도 자주 왕따를 당했어오. 왕따의 표적이 되기 쉬웠던 거죠.

그때의 무서운 느낌이, 아직도 내 안에 남아 있어요. 종종 그런 꿈을 꾸기도 하고요."

 "그렇다면 오랜 시간 노력해서 조금씩 극복해 왔겠지. 그때의 언짢은 기억을 떨쳐버리려고."

 "네, 조금씩이요"라고 마리가 말한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인다.

 "조금씩. 그런 타입이이에요. 노력하는 성격."

 "혼자서 열심히 노력하는 숲 속의 대장장이 같은?"

 "그래요."

 "맞아, 나는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훌륭한 거라고 생각해."

 "단지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그렇다는 거예요?"

 "맞아, 노력할 수 있다는 것이."

 "달리 아무 장점이 없어도요?"

 고오로기는 아무말 없이 미소 짓고 있다.

 마리는 고오로기의 말에 대해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잇는다.

 "시간을 가지고, 자기의 세계 같은 것을 조금씩 만들어왔다는 생각은 들어요.

그런 세계에 혼자 있으면, 어느 정도 안도감이 생기거든요.

하지만 그런 세계를 일부러 만들 수밖에 없다는 것 자체가,

나 자신이 상처받기 쉬운 약한 인간이라는 뜻 아닐까요? 그리고 그 세계란 것도 세상의 눈으로 보면,

아주 작고 보잘 것없는 세계에 불과하잖아요. 골판지 상자로 만든 집처럼,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어딘가로 날아가 버릴듯한......"

 (중략)

 "나는 요즘 옛날 일을 자주 생각하곤 해. 이렇게 일본 천지를 도망쳐 다니게 된 이후부터는,

특히 더 그렇지. 그런데 열심히 생각해 내려고 노력하다 보면, 옛날 기억들이 꽤 생생하게 떠오르는 거야.

아주 오래전에 잊어버렸던 일이, 뭔가 우연한 계기로 문득 생각나기도 하지. 그건 꽤 재미있는 일이야.

인간의 기억이란 정말 이상야릇한 거야. 아무 쓸모 없는 것 같은 하찮은 일도,

서랍 속에 잔뜩 챙겨놓곤 하지. 현실적으로 필요하고 중요한 일은 자꾸 잊어가면서 말이야."

 고오로기는 텔레비전 리모컨을 또 손에 든 채, 그 자리에 서있다.

 그녀는 말한다. "인간이란 결국 기억을 연료로 해서 살아가는 게 아닌가 싶어.

그 기억이 현실적으로 중요한가 아닌가 하는 것은, 생명을 유지하는 데 아무런 상관이 없지.

단지 연료일 뿐이야. 신문의 광고 전단지나, 철학책이나, 에로틱한 잡지 화보나, 만 엔짜리 지폐 다발이나,

불에 태울 때면 모두 똑같은 종잇조각일 뿐이지. 불이 '오, 이건 칸트로군' 이라든가,

'이건 요미우리신문의 석간이군' 이라든가, 또는 '야, 이 여자 젖통 하나 멋있네' 라든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타고 있는 건 아니잖아. 불의 입장에서 볼 때는 어떤 것이든 모두 종잇조각에 불과해.

그것과 마찬가지야. 중요한 기억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기억도, 전혀 쓸모없는 기억도,

구별할 수도 차별할 수도 없는 그저 연료일 뿐이지."

 고오로기는 혼자서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이야기를 계속한다.

 "만약 그런 연료가 내게 없었다면, 그래서 기억의 서랍 같은 것이 내 안에 없었다면,

나는 아마 아득한 옛날에 뚝 하고 두 동강이 나 버렸을 거야. 어딘가 낯선 곳에서 무릎을 끌어안은 채,

길바닥에 쓰러져 개죽음을 면치 못했겠지. 중요한 것이든 아무 쓸모 없는 것이든,

여러 가지 기억을 때에 따라, 꺼내 쓸 수 있으니까, 이런 악몽 같은 생활을 계속하면서도,

나름대로 살아갈 수 있는 거야. 더 이상은 안 돼, 더 이상은 못 해, 하고 생각하다가도,

어떻게든 그 난관을 넘어설 수 있는 거지."

 마리는 의자에 앉은 채, 고오로기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그러니까 마리 짱도 열심히 머리를 짜내서, 여러 가지 일을 기억해 봐. 언니에 대한 일을.

그건 틀림없이 중요한 연료가 될 테니까. 마리 자신에게도, 또한 마리의 언니에게도."

 마리는 잠자코 고오로기의 얼굴을 보고 있다.

 고오로기는 다시 한 번 시계를 본다. "이젠 정말 가봐야겠는걸."

 "고마워요. 여러 가지로." 라고 마리가 말한다.

 고오로기는 손을 흔들며 방에서 나간다.

(중략)

 마리는 그 색다른 방 안에 홀로 있으면서 오히려 보호를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녀는 아주 오래간만에, 자신이 편안한 마음을 갖게 됐다는 것을 깨닫는다.

의자에 몸을 깊숙히 묻고, 눈을 감는다. 그리고 그대로 깊은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짧지만 깊은 잠.

그것은 그녀가 오랫동안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의 '어둠의 저편' 중에서. 오전 04:33 의 부분.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는 그 첫부분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었다.

그리고 불과 몇 장을 채 넘기지 않은 채로, 그렇게 근 1년이란 시간이 흘러가버린 듯 하다.

짐속의 책들과 따로 분리되어 있는 관계로 어쨌든 읽기 시작한 책의 세번째가 되버린, 이 하루키의 소설.

그의 데뷔 25주년 기념 작품이라는 이 작품은, 그닥 사람들에게서 많은 말을 듣지 않았던 것도 있었고.

읽기 시작하면서 과연 이 이야기의 전말은 무엇일까가 문득 궁금하게 만들었다.

대체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이렇게나 장황한 전개가 시작된 것일까 하고 말이다.

이 전에 읽었던 '일요일들' 이라는 요시다 슈이치의 책과 같이 서로 다른 이야기지만 어딘가 연결되있는

단락단락의 그 이야기들의 구성처럼 이 책도 그렇게 구성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읽어가면서 내내 별 것 없잖은가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며칠,

드디어 어젯밤 잠들기 전, 버스 안에서 채 마져읽지 못했던 한 단락의 마지막부분의 이야기.

바로 저 위의 내용이 그것이다. 정확히 마지막 부분은 아니지만,

책의 후반부의 뒤쯤에서 던져져 나오는 대화들.

이 부분을 읽는 순간 무언가 머릿속에서 번쩍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아, 이 소설은 그것이구나.' 하는 무언가의 깨달음 비스꾸레한 것들의 스쳐감이었다.

근 10일간에 걸쳐서 3권이라는 책을 읽어내면서, 그저 나는 어떤 도피처로만 여기고 있었던 책읽기가

아녔을까라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더불어 역시나 하루끼라는 생각도 머릿속에서 잔잔히 밀려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서 나 역시나 그 단락을 두 번, 세 번 다시금 꼼꼼히 읽어본 후에야,

편히 잠에 들 수 있었던 듯 하다. 괜히 무언가 기분이 좋았던 것 같다.

그저 그날 처음 마주한 사람과의 문득 대화가 마리라는 주인공이 언니와 직면한 문제를 털어놓게 되고,

그 문제를 들어주다 고오로기라는 영화의 한 엑스트라 즈음의 인물이 될 듯한 그녀에게서.

이 소설의 전말이 건네어지고 있는 것이다.

'기억이라는 것의 연료'라. 참 마음에 드는 표현이었다.

그리고 참으로 많이금 수긍이 가는 표현이다.

하루의 마무리라고 해야할지, 하루의 시작이라 해야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어둠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그 시각에 벌어진 이야기를 한 권으로 정리한 이 책은.

아마 어쩌면 읽고있는 사람에게 판단을 알아서 맡겨버리는 듯한 느낌이 전해진다.

하루키라는 작가의 의도대로 읽는 사람마다 그 해석과 감상이 평이하게 다를 수 있게 말이다.

물론 나만의 생각이지만 말이다.

책을 마무리하여 전부 읽고 난 후에도 남는 잔상이라는 것이.

자꾸만 맴도는 주인공 마리짱과 고오로기라는 이의 대화가 내내 아른거림이다.

그냥 집으로 바로 돌아오는 건데, 영화를 한 편 보고오는 바람에. 너무나 지체되어버린 시각이다.

내일 수업준비를 아직 채 못한 상태인데 말이다.

솔직히 마음에 이 부분이 와닿았던 이유는 그제서야 잠을 깊게 잘 수있게 된 그녀가 부러워서였을까나.

시간 지나고 나면 열 아홉살 주인공인 마리는 그저 어젯밤의 일과들이 시간에 지나 묻혀 버릴테지만,

그 덕분에 자신 스스로에게서 무언가를 얻어낸 셈이 된 것이니,

그저 소설이지만 현실에 빗대어 볼때, 정말 잘 된 것이 아닌가 말이다.

그래도 읽는다고 책을 읽었으니 무언가 반영 되어지는 것이 있다는 게 다행아닌가.

흣. 이 전의 두권에서는 그런 것들을 확실히 얻지 못했던 것 같은데, 역시나 하루끼라나 뭐라나.

나에게 있어선 말이다.

아직도 '해변의 카프카'라는 책을 읽을 때의 그 느낌도 잊을 수 없는 고로,

그 땐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머릿속이었었는데 라는 기억을 떠올려봄이다.

역시나 별 수 없이 사람이라는 존재. 나도 그러하기 때문에 당장 중요한 그것이 아닐지라도,

이렇게 살아내는 것의 일부로 뱉어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말이다.

그나저나 다음엔 무슨 책을 읽는다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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